아보가드로와 아보가드로의 법칙
아보가드로는(1776~1856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 화학자) 프랑스에 가까운 토리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유명한 법률가로 사르데냐 왕국의 요직에 있었다. 때문에 아보가드로도 처음에는 법률교육을 받아 1796년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후 법률 실무에 종사하면서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여 전기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결과 l806년 토리노 대학의 조교수로 채용되고 1809년에는 토리노에 가까운 베르첼리의 왕립 전문학교의 실증철학 교수가 되었다. 1820년에는 토리노 대학에 신설된 수리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811년 프랑스의《물리학잡지》에 발표한《원소입자의 상대질량 및 그런 화합비(化合比)의 결정 방법에 관한 시론》에서 전개한「아보가드로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당시에 시대를 앞선 이론이었기 때문에 1860년 칼스루에의 화학국제회의에서 S. 카니차로(Stanislao Cannizzaro)가 이에 대한 연구 발표를 하기까지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발표하기까지의 과학사적 흐름을 살펴보자.
1662년 보일이 보일의 법칙을 발견한다. 보일의 법칙의 핵심은 '어떠한 기체든지 압력이 증가하면 부피가 감소한다. 그리고 그 비율은 기체의 종류에 상관없이 거의 일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L의 기체가 수소이든, 산소이든 상관없이 압력에 따라 변화하는 부피의 비가 거의 일정하다는 것이다.
1772년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산화반응에 대한 실험을 통해 '모든 화학 반응에서 반응 전과 후의 물질의 양은 동일하다' 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한다. 1799년 프루스트는 바다와 광산 또는 내륙에서 형성된 염화 소듐을 통해 '주어진 화합물에서 그 화합물을 조성하는 원소의 질량 비율은 그 화합물의 출처나 제법과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일정성분비의 법칙을 발표한다. 1802년 돌턴은 기상학자로서 대기에 대해 연구를 하는 중에 대기가 화합물인지 혼합물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관측 자료로는 대기가 화합물의 성질로 여겨졌던 일정 조성의 비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기체의 부분압력 법칙을 알아냄으로써 대기가 혼합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대기가 순물질로서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여러 기체의 혼합 비율에 따라 각각 독립적인 압력의 합으로 전체의 압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기체가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1803년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입자의 가설(원자설)을 도입하여 질량보존의 법칙과 일정성분비의 법칙을 잘 설명하였다. 돌턴은 원자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물질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로 되어 있다.
2. 주어진 원소의 원자들은 질량과 모든 성질에서 동일하다.
3. 서로 다른 원소들은 다른 종류의 원자로 되어 있으며, 특히 이들 원자들은 질량이 다르다.
4. 원자들은 파괴될 수 없으며, 화학 반응 중에도 그 실체를 보존한다.
5. 화합물은 서로 다른 원소의 원자들이 작은 정수비로 결합하여 생성된다.
이후 돌턴은 같은 해인 1803년에 '두 원소가 일련의 화합물을 만들 때 일정한 질량의 한 원소와 결합하는 다른 원소의 질량은 서로 작은 정수비로 존재한다.'는 배수 비례의 법칙을 발견하여 원자설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러던 중 1808년에 게이 뤼삭이 '동일한 온도와 압력 하에서 반응하는 두 기체의 부피는 간단한 정수비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각 생성물의 부피와 반응 기체 중 어느 하나의 부피와의 비율도 간단한 정수비이다.'는 기체반응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게이 뤼삭의 기체 반응의 법칙은 돌턴의 원자설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어떤 물질 2g과 다른 물질 1g이 만나면 생성되는 새로운 물질이 3g이 된다는 것은 잘 이해되었지만, 왜 부피 2L의 어떤 기체가 부피 1L의 다른 기체를 만나면 2ℓ의 새로운 물질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기체의 부피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돌턴의 원자설만으로는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에 수소와 산소는 쪼개져서 다른 물질로 바뀌지 않는 물질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렇게 쪼개지지 않는 물질을 그 당시에는 원소라고 불렀는데, 돌턴은 원소가 한 종류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물은 수소와 산소 원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화합물로 이해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물은 수소와 산소로 쪼개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돌턴은 반응물이었던 수소와 산소를 원자로 표현하고, 물은 화합물을 의미하는 복합 원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위의 생각을 화학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응식의 계수들은 게이뤼삭이 관찰한 부피비와는 일치 하지 않는다.
반면 아보가드로는 보일의 법칙을 통해 '기체의 종류에 상관없이 압력에 대한 부피 변화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한 돌턴의 '부분압력 법칙'과 '원자설' 또한 알고 있어, 돌턴이 기체의 압력을 그 기체의 양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아보가드로는 기체의 입자가 얼마나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 기체의 압력을 나타내고, 어떠한 기체이든지 압력에 따라 결정되는 기체의 부피는 거의 유사하다면, '같은 온도, 같은 압력에서 같은 부피 속에 기체의 종류에 상관없이 같은 수의 입자가 들어 있다.' 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여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더 나아가 아보가드로는 이 가설과 그 당시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돌턴의 원자설을 기초로 하여 기체 반응의 법칙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 때 아보가드로는 교과서에 설명되어 있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수소와 산소가 반응하여 수증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피의 비는 2 : 1 : 2이다. 여기에 돌턴의 생각을 받아들여 '수소와 산소는 원자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들이 차지하는 부피는 자신의 가설에 맞춰 기체의 종류에 상관없이 일정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산소 원자는 두 개로 쪼개져야 하므로, 돌턴의 원자설에서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산소 원자가 쪼개지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아보가드로는 산소 원자 두 개로 이루어진 새로운 입자를 가정하였는데 이것이 곧 분자이다. 이러한 복합 분자의 형태는 아보가드로가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돌턴도 물이나 다른 물질을 표현할 때도 복합 분자를 이용하였다. 그렇지만 아보가드로는 그 복합분자를 산소와 같은 원소에 처음 적용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아보가드로의 생각은 널리 인정되지 못하였다. 돌턴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들은 원소는 원자상태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고 부분압력 법칙을 설명할 때도 같은 부피 안에 다른 개수의 기체가 존재함을 가정하여 설명하였다. 그러한 생각은 기체 반응의 법칙을 설명하는데도 이용되었기에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결국 아보가드로가 죽고 S. 카니차로가 아보가드로의 가설에 입각한 연구 발표를 한 후에 인정을 받았고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0℃, 1기압 상태에서 22.4L 속에 있는 기체 입자의 개수 즉 1몰의 개수인 6.02×1023개를 아보가드로의 수라 부르게 되었다.
참고 문헌
한국창의재단 지식 백과
옥스토비 일반 화학
아보가드로는 그의 가설을 어떻게 도출해 내었을까? 백성혜 대한화학회 200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