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보는 화학 화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나일론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입고 있을까(1)

진정일  2022-07-11 VIEW : 852

언제부터 인류가 직물을 만들어 사용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미 4600여 년 전에 황제용 의복제조에 비단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비단실은 누에고치에서 얻는다. 마와 면섬유도 오래전부터 사용하였으나, 비단은 천연섬유 중 가장 고급제품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다. 아마 여러 색으로 아름답게 염색하기가 쉬울 뿐 아니라, 촉감이 매끄럽고 좋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비단은 많은 섬유 가운데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엔 양모는 보온력은 우수하지만 깔깔한 촉감과 염색성이 나빠 그 용도가 제한적이다.

중국에서는 비단 제조기술을 매우 중시하여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했다. 따라서 비단 제조기술은 6세기 중반에야 중국으로부터 중동과 유렵에
전파되었고, 9세기 초에 아랍 군대가 시실리를 점령한 후에는 이곳이 비단 직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6세기 중반 비잔틴제국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가 기독교 수도승들에게 중국에서 누에알을 훔쳐오라는 비밀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그 후 비단 직조기술은 서서히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16세기에는 프랑스 리옹에서 비단산업이 번성했고, 19세기 말까지 프랑스는 세계비단시장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프랑스 전역에 누에가 병들어 죽어가는 커다란 재앙이 퍼져 프랑스의 비단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명언처럼 프랑스의 샤르도네는 천연비단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인조비단을 방명하였다. 19세기 중반 스위스
바젤대학의 화학과 교수였던 크리스티안 쇤바인이 셀룰로오스를 질산과 반응시켜 만든 질산셀룰로오스를 그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샤르도네는
이 질산셀룰로오스 용액을 방사하여 천연비단 섬유와 비슷한 촉감을 갖는 인조비단실을 만들어냈다. 그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이 비단을 출품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샤르도네 비단이라는 이름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샤르도네는 인조비단을 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발적인 처음의 반응과는 달리 샤르도네 비단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질산셀룰로오스는
폭발성이 강해 화약으로 사용해왔으며 종종 면화약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질산과 반응을 덜 시키면 폭발성은 줄어들지만, 인화적은 계속 남는다.
그러므로 샤르도네 비단옷을 입고 난롯가에 가까이 다가간 숙녀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니트로셀룰로오스라고도 부르는 질산셀룰로오스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질산셀룰로오스 필름을 영화촬영에 처음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도 영화를 ‘필름(film)’이라 부른다. 가연성이 강한 필름 테이프를 영화테이트가 퍽, 퍽 소리를 내며 인화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또
1910년에는 베이클라이트가 상아로 만든 당구공의 표면을 질산셀룰로오스로 매끈하게 코딩해 사용했다. 이들이 빠른 속도로 세게 부딪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쉽게 상상이 되리라 믿는다.
다시 비단 이야기로 돌아가자. 20세기 들어서면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비단제조업이 번창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비단시장을 일본이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뒤퐁사는 합성섬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캐러더스 박사가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연구진에
합류한 후 연구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캐러더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유기합성화학자로 인정받고 있던 터였다. 그의 천재성은 대학 상급반
재학 중 자기가 다니던 화학과에서 강사로 하급생을 가르쳤을 정도였다.
 

※ 본 내용은 `진정일의 교실밖 화학이야기`에서 일부 발췌 하였으며, 저자와의 협의를 거쳤음을 알려드립니다.